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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 소명과 사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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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8-10-26 17:59 조회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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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 소명과 사명

친밀함과 외적인 표현


* 이어지는 글입니다.


종교적인 의무들을 시작하는 나이인 12살 때,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고 선언하셨지만 여전히 18년을 더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신동이라고 불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아버지와의 친밀함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인간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기도 안에서 양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에제키엘서와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은 엄격하고 율법적인 사고를 줄이고, 마음의 회개에 더욱 집중하셨으며 정치적인 조류였던 당대의 메시아적 조류를 포기하셨습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은 영들을 식별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마르코 815)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사야서와 에제키엘서를 읽으셨을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의 성심을 관상하며 이사야 52절과 에제키엘 36절을 읽는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말씀들에 깊은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이 구절들이 당신과 당신의 사명에 대한 언급인지를 질문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사야 421 :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이사야 426 :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많은 성경을 읽고 오랫동안 기도하시면서 예수님은 이 예언들이 당신을 가리킨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어린 예수, 젊은이에서, 성숙한 인간이 되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그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기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예언이 이 자리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우물에서 만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도 식별의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안으로 들어온 겸손하신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무대에 등극하셨지만, 자신이 그것을 세웠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부와 성령께서 분명히 존재하고 계시다는 것이 예수님의 식별을 확인시켜주었고, 이 감각은 예수님 안에서 점차 성숙하였습니다. 성부의 말씀에 따라서 예수는 야훼의 종, 메시아로서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명을 받으신 예수님을 제대로 관상하기 위해서는 기도하시고 성경을 읽으시고, 시편을 노래하시고, 식별하시는 예수님을 관상해야 하며, 사람들을 양성하시고, 기다리시고, 순례하시고,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관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구유에서의 탄생, 이집트로의 망명, 오랜 침묵의 사생활, 사막에서의 기도, 요르단강에서의 세례 등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구원 속에 깊게 침잠하여 이 모든 것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무슨 순간인지를 식별하지 않는다면 사명을 받은 우리의 모습이나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결실을 보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하는 일의 연속이 아니라 삶, 매일의 역동성의 연속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활동 중의 관상이라고 합니다.

 

기도와 사도직의 역동적인 관계라는 이 주제는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예수님의 삶을 관상하는 것은 깊은 인격적인 만남의 시간이며 파견되는 장입니다. 모든 것을 겪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해하고, 감동을 하고, 치유하고, 인간의 노력을 배가하고,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며, 적들의 유혹에 노출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관상하는 것은 사도직으로 나아가려는 동기이자 더 친밀해지라는 초대입니다. 때때로 이로 인해 의지가 더 강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이 더 강하게 움직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결실에 더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치유의 체험에 더 많은 영향이 있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성심을 관상하면서 더 많이 감동을 합니다.

 

관상하면서 기도하면 우리 안에 다섯 가지 영적 감각이 성장합니다. 관상 기도는 특히 민감성과 창의적인 상상력을 키웁니다. 공생활을 하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우리는 점차 예수님의 사도적 지혜를 닮아가게 됩니다.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단순한 삶의 방식이 자라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을 관상하면서 사명 안에서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자라납니다. 비유들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지혜와 겸손한 태도가 커집니다. 예수님 앞에 엎딘 사마리아 여자를 관상하면서 풍성한 사도적 상상력이 성장합니다. 이렇게 벌어지는 모든 것은 기도와 삶이 서로 성장시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길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끌리게 되고,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 우리 길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마음이 이끌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우리가 본 것에 대한 고통이나 마음의 동요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떨림을 깨닫고 그런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활동과 관련하여 우리를 내어놓고 봉사하게 되면 기도를 통해 우리는 메마른 땅에 풍요를 가져다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사도적 영감의 원천입니다. 이는 위에서 오는 지혜입니다. 이는 우리 삶의 비료입니다. 이는 마음을 뜨겁게 하는 만남입니다. 도전이며 확인이며 힘을 유지시키며 변화하게 합니다. 이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서는 사도직이 없습니다. 기도는 은총을 키우고 기도로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떠나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체험을 하셨던 예수님의 이 역동성을 오늘날 평신도로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더 깊게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을 위해서 파견되고, 다시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할 수 없을 수 있지만 분명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에서부터 예루살렘 입성까지 그리스도의 삶을 관상하면서 성부와 당신의 사명과 관련하여 예수님께 벌어지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과 관련하여 무엇인가가 일어납니다. 하느님과의 친밀함이 점차 커지면서 우리는 사명을 보다 더 의식하게 되고, 활동에 우리를 더 개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이자 부르심입니다.  

 

이런 친밀함과 외적인 표현이야말로 교회와 세상 안에서 평신도 성인으로서 우리의 여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예수님의 사명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끝-


*이 글은 프로그레시오 부록 #59(2004년 12월)에 실린 글로, 당시 CLC 부의장인 Jose Reyes가 2004년 에콰도르 퀴토에서 열린 마지스 프로그램에서 한 연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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