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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방법 - 관상기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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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1-28 13:44 조회1,3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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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총 안에서의 일치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의 보다 깊은 일치로 나아간다. 성령은 스폰지에 침투되는 물처럼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스폰지를 물에 담글 때, 빛나는 매혹적인 거품들이 표면에 떠오른다. 거부의 단계는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잠기게 한다. 많은 헛된 시각들이 우리 삶 밖으로 나오면서 하느님의 완전한 현존을 위해 우리 마음의 방을 비우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안의 주님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를 소멸시키고 나를 노예로 만드는 침입자로 오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나를 흡수해 버리는 ‘매혹’도, 나를 파멸시키거나 손상시키는 완벽의 ‘위급함’도 아니시다.
  하느님은 내가 그 안에서 온전한 내 자신이 될 수 있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받을 수 있는 ‘친교의 주님’이다. 하느님은 내가 내 자신이 될 수 있고, 나의 단절된 현실의 모든 것 안에서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해주시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의 자신 모두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성숙되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내 자신을 수용한다. 속임수와 엄격함으로 나의 진실을 위장하면서 완벽한 체 하지도 않는다. 나는 나의 인격을 반기며 나의 ‘혼돈과 잘못’보다 더 깊은 차원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되는 포옹’을 통해 통합되어간다.
  경배라는 단어는 역사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자기를 내어놓으면서 살아가는 친교의 경험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오 4,10)”. 그것은 나를 침묵의 관상이라는 보호받는 환경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왕국이 건설되고 있는 세계에로 나를 일치시키고 나아가게 하는 ‘경배’인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다. 우리는 우상들(프로젝트, 이데올로기, 인물들...)을 숭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소유물을 가져가며 미래를 향한 창조적 여정의 불투명함과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은 ‘안전’을 미끼로, 혹은 눈앞에 바로 보이는 효과적인 ‘현혹의 불빛’을 교환조건으로 하여 우리를 노예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지 못하는’ 하느님, 그리고 미래와 마주치면서 나는 보다 깊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즉, 내 고유의 신비, 그리고 그것의 역사가 선의 원천이고, 새로운 가능성들의 무한한 근원의 하느님 안에서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 신비는 더 이상 단순한 모호함이나 느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젠가 자신의 때가 오면 드러날 비밀스럽고 알 수 없는 미래의 씨앗인 것이다. 하느님 왕국은 우리의 땅에 뿌려지는 것이다. 그 왕국의 때에 씨앗은 싹트고 추수의 풍요로움에 이를 것이다(마르 4,25-29).
  하느님이 그분의 모든 신비 안에서 주님이 되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우리의 말과 우리의 계획을 멈추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은총의 침묵 안에 내어맡기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위협적이거나,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당하거나, 친교 안에 매몰되는 일 없이 우리 모두의 고유성 안에서 바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갈등 없이 우리는 완전히 성숙하지 못할 것이다. 관상 안에서의 침묵을 통해 나는 하느님이 하느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해드리는 방식으로 타인들이 그들 자신이 될 수 있게 한다. - 이는 곧 내가 내 자신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주님의 역사에 대한 경배는 은총의 경험이다. 내가 영향을 미치거나 요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받는 것이다. 사랑, 용서, 우정.., 삶의 기본적 관점들과 같은 하느님의 선물들은 요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상 안에서의 침묵중에 나는 하느님과 기꺼이 가까워지며, 그분에게 나 자신을 자유로이 드린다. 나는 내 생명의 선물을 주님께 드린다. 나는 이윤 남기기를 원하는 후원자나 투자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투자가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말, 시간, 그리고 나의 활동들을 드릴 뿐 아니라 나의 전 존재를 드릴 것이다. 내가 자유롭게 받아왔던 것을 자유로이 내어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 존재를 포함하는 것이다. 경배는 내가 단순히 인식이나 성찰을 통해 들어갈 수 없었던 나의 심장의 깊은 구석에 닿게 한다. 그것은 공포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 즐거운 나눔과 신뢰가득한 모든 것에 나의 삶을 내어주지 못하게 하는 탐욕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
  사회의 어두운 심층부, 억압의 무덤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와 계획들은 혼돈과 불투명함으로 보여질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다음 세 차원의 경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점점 그분 자신이 되어가는 것, 내가 하느님 안에서 점점 내 자신이 되어갈 수 있는 것,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느님이 더욱 더 우리 세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억압의 심층부에서, 우리는 삶의 봉사와 주님의 왕국에 대한 헌신을 통해 받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내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어떻게 우리는 그들의 은총과 행복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설명을 뛰어 넘어, 이들 가난한 사람들, 지극한 단순함을 지닌 그들이 우리에게 은총 어린 관상의 아름다움을 제공해 준다.

 

 예언자들의 관상

* 예언자 예레미야는 불의와 우상을 소멸시키고 정의와 법을 세우려는 투신의 모든 강점으로써 기도하였다. 그는 특별히 어려운 순간을 거친다. 사람들은 그를 깔보기를 좋아하였다. 그의 친구들조차도 그가 잘못을 저질러서 좌절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마치 자신이 사람들의 광대처럼 느껴졌다.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었다(예레20,1-2).
  그의 소명은 그를 깊고 성숙한 고독으로 이끌고 갔다. “저는 웃고 떠드는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를 가득 채운 당신의 분노 때문에 당신 손에 눌려 홀로 앉아 있습니다”(예레15,17).
예레미야는 상황의 무게에 압도당하여 그것을 피하거나, 기도의 문 앞에다 그것을 떨구어 두거나 혹은 그의 말과 사고 뒤에 감추려 하지 않고 하느님과의 전적이며 충실한 만남을 가지려 애썼다.

 

* 예레미야는 완전히 혼돈스러웠다. 그의 감정을 하느님께 표현하였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예레15,16).
  지금 예레미야는 거의 신성 모독에 가까운 거친 언어로 그의 극심한 모든 고통을 표현한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 갔습니다”(예레20,7). 절대적 자유 안에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말로 위협하지 않고 또한 그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의 양심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그는 결심을 하였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예레20,9)”.
  그러나 양심을 꿰뚫어보시는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말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그가 진실로 느끼는 것, 하느님이 그의 양심 안에서 이미 보여주셨던 것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은 예레미야와 대화하시고 그가 “뼛속에 가두어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예레 20,9)” 느낌을 갖도록 해주셨다. 묵시록의 저자(10,9-11)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삼킨다. 그것이 그의 입안에서는 꿀 같은 맛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의 위에 들어가서는 쓰고 시큼한 맛으로 변하게 된다. 사람들과 국가들을 향한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말씀’은 거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은 활동하는 하느님 현존의 징표이며 물리적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기도 하다. 불이 타오르면 고통을 주지만 그것은 빛과 온기를 주기도 한다. 그가 소명을 저버리려는 결심과 비통함의 포로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불이 예레미야의 뼈 속 깊은 곳에서 타오른다. 그것은 예언자의 입술을 통해 하느님의 새로운 말씀이 세워지는 ‘불’이다.

 

* 진정한 전투는 예레미야의 속임과 하느님의 현존 사이의 싸움이다. 예레미야는 이 불과 그의 마음 안에서 잉태되고 있는 이 말씀을 지키려고 대단한 노력을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예레20,9). 그는 전(全) 존재로서 그 불에 대항한다. 그것은 새로운 속임에 대한 그의 두려움인가? 혹은 그의 소명의 어려움에 대한 증오인가?
  일찌기 같은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을 “ 물이 마르다가도 흐르고 흐르다가도 마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도랑”으로 비교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전보다 더 깊은 자신감을 그의 마음 안에 일깨워주시려 하신다. 
  “내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 그것은 그를 정화시켜 진실한 말씀이 그 안에서 잉태되게 하여  ‘버릴 것 없는’ 말씀은 하느님의 ‘입’이 될 것이다(15,18-19).

 

* 말씀의 쓴맛과 그의 뼈 속에서 나오는 그 불은 하느님과의 보다 깊은 일치로의 길, 하느님에 대한 신비스럽고 놀라운 충성심을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의 길을 연다. 야훼는 내 옆에 계신다(예레20,10). 이는 일치의 언어이다. 이러한 파스카를 통하여 예언자로서의 그의 소명은 새로운 지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의 적들은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또 다른 경우에 적들은 그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요새의 청동 벽’ 같은 것을 느꼈다(예레15,20-21).
  사회 내부의 외적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하느님과의 영성적 투쟁으로 변화해오고 있다.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잉태되고 있다. 일치는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일부에 관해 오로지 불충과 속임수로서 이해했던 바로 그곳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만남의 끝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에 대한 노래와 찬양으로 초대되어진다(예레20,13). 이는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일치의 경험이다. 우리는 아름다움, 질서 그리고 성공 안에서만 하느님을 만나지 않는다. 하느님의 초월성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찬양과 노래의 관상 안에서 우리의 내적 분열을 조화시키고 우리의 상처를 싸맬 수 있게 된다. 이는 새롭고 강한 투신의 탄생을 가져온다.   -끝-

 

 

 *프로그레시오 부록 42,43,44 합본호(1995,12)에서 벨췌해 옮긴 글로,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능케 하는 관상 기도의 역동성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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