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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방법 2 - 식별의 기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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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6-21 15:29 조회8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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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방법 2 - 식별의 기도 (2)

 

식별 과정

■ 관대한 마음으로 마음 열기
식별은 관상과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삶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것이다. 식별의 기본적인 태도는 관상 안에서 익히게 된다. 먼저, “홀로(solely)” 그리고 “순수한(purely)” 상태에서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내고 통합시키시는 유일한 정점인 하느님께로 다가서게 된다.

 

 둘째로, 관대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어떻게 영웅적인 일을 성취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을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더불어 감추어진 자신의 욕망에 이끌리지 않으면서 해 나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런 측면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담아내고 있다. 이런 사람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질 때,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는데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된다. (필리 1,9-11)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계획을 드러낸 후에 놀라움으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로마 11,33,36). 이는 시간을 초월해서 하느님의 계획을 관상했던 한 인간의 경이로운 고백이라고 하겠다. 사랑을 인식하고 순명하는 것이 바로 관상이다.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로마 12.1)
 

바오로는 하느님이 뜻하시는 일은 신비롭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로마 11,34)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이면서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다면 즉 사치스러운 특별석이나 이 세상을 조종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에 따라서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할 수”있게 되고, 더불어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 12,2)

나아가 우리 자신을 근심에 사로잡히도록 방치하거나 혹은 자신이 상상한 데로 따라가지 않고, “저마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 따라”(로마 12,3) 허락하신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속한 “몸(로마 12,4)”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된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특하고 고유한 역할을 갖게 될 것이다.

 

■ 늘 깨어있는 영에 대한 인식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우리들이 갖는 영감이 “하느님에게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
 
하늘과 땅만큼이나 우리와 하느님의 뜻 사이의 거리는 멀지만 (이사 55,9 참조)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은 역사의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드러난다(에페 1,9 참조). 신약에서는 우리가 잠자고 있는 동안에 하느님의 방문을 받고 소스라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고 일러주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식별하느냐 못하느냐를 가리는데 본질적인 것이다.

 

■ 오늘 우리의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활동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언제 비가 올 것인지, 또 해가 날 것인지 등의 자연의 변화를 아는 데는 능숙한 이들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징표를 알아차리는 데는 무능한 것을 꾸짖으셨다.(루가 12,54-56)

오늘날에도 옛 것들 가운데에 하느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쇄신의 징표가 있다. 예수님은 꾸준히 또 분명하게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순간과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라고 나자렛의 회당에서 말씀하신다.

 

■ 하느님께서 진실로 나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알고 있다. 이념주의자들이나 처세가들은 다른 사람들의 결정을 부추긴다. 또한 사람들은 때로는 현실적이면서도 복음적인 기대를 갖거나 때로는 과도한 기대를 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로도 우리는 다른 이들의 불가능한 바람에 맞춰서 일을 해나갈 수는 없다. 우리들이 갖는 한계에 맞추어 사람들의 문제에 응답하다 보면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있다. 일부 급한 상황의 극적인 국면에서는 우리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에너지를 소모함으로써 본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때로는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분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아버지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길로 끌어당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나를 나로서 온전히 존중해 주시고 내 존재의 모든 현실 안에서 나를 나로서 알고 사랑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다. 그분은 당신께서 요청하시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은총 또한 주시고자 한다. 나는 그분께 홀로 응답해야만 한다. 하느님의 의지가 나의 바람을 무산시킬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이나 처세가들의 기대 역시 좌절시킬 수 있다.

 

■ 어떠한 충동이 내안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어디로 나를 이끄는 것인가?
일련의 충동들(생각, 감정, 영혼의 상태...)이 내안에서 끓어오르고 있다. 나는 어느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또 사탄으로 부터 온 것인지 식별해야 한다. 어떤 때는 둘을 구별하는 것이 쉽게 보일 때도 있고, 다른 때에는 이런 충동들이 “빛의 천사” (2고린, 11,4)의 옷으로 가장(假裝)해서 우리 자리로 들어 올 때도 있다. 원수는 “거짓말쟁이이고 거짓의 조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노예와 살인자로 유인해” 가기 때문이다.

나를 억압하는 힘과 나를 해방하는 힘을 구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느님의 뜻에 나를 일치시킬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가는 음험한 힘의 흐름에 내맡김으로써 내 존재로부터 스스로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과 기도 안에서 내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분명하고 꾸준하게 시험해 봄으로써 나는 점점 예수님께서 고백하신 것과 같은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때”가 오면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요한 10,18)

 

■ 결단(The decision)은 자유를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더욱 더 우리의 자유를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현실을 받아드릴 수 있게 되고 우리가 갈 여정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를 드러내는 표현으로서 “결단”을 하게 된다. 이 결단은 고통스러운 측면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길을 버리고 한 길만을 선택해야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쁜 측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느님 뜻으로 깨닫게 된 것을 선택한다면, 이는 나를 생명의 길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매우 작고 사소한 결정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채 내리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런 각각의 작은 결정들을 전체과정과 상관없이 따로따로 해나간다면 이 결정들에서는 좋은 것들을 별로 담아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오랜 항해를 할 때, 작은 방향키의 움직임과 같이 이 결정들은 인생의 지침이 될 “큰 결단”들 안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큰 결단들은 몇 개 안됨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큰 결단들 안에서 이루어진 작은 결정이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잡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뱃전에 부서지는 물살의 흐름과 싸우면서 그 배의 운명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찾는 것과 같다.

 

어떤 결단은 ‘밖으로’ 나가도록 하는데, 이것은 사도적인 계획을 담고 있다. 또 다른 것은 ‘내면에’ 머물며 드러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둘 다 필요하다. 내 안에 있는 것은 갖가지 방향성을 가진 경향들이다. 이 안에서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생각과 정서를 선택해야 하고 파괴적인 힘을 걸러내야 한다.

외적인 상황들은 늘 내 열망대로 변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내면적인 한계들은 몸속에 박힌 바오로의 가시처럼 우리가 제거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나는 이 한계를 파괴적인 방식으로 대면할 수도 있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대면할 수도 있다. 이 한계를 나는 파괴하는 감옥처럼 여기며 살 수도 있고, 혹은 이 한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여 내가 갇힌 감옥의 어둠 속에서 때가 되었을 때, 빛 안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게 내 안에서 성숙시킴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생각과 정서를 선택할 수도 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 관상기도에 관한 두번째 글입니다. (프로그레시오 부록 9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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