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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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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9-13 12:24 조회3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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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인식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감각 성찰
하느님에 대한 감각이 자라날 필요가 있다

 

 

마르코 복음 1,32-34절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여러 가지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악마들을 물리치시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도 그 때와는 좀 다르기는 하지만, 또한 여러 질병들과 악령들이 있다. 악한 종교사회적 구조 안에 안주해 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맞부딪혔던 시간 외에, 예수님은 죄와 악령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이셨다. 우리는 개개인을 치유하라는 부르심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가두고 하느님께 향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한 구조를 변화시키라는 부르심도 함께 받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선택한 우리들에게 기대되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희망의  복음과 치유가 우리를 통해서 표징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화의 의미다. 복음화는 세상에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우리의 삶 안에서 이런 메시지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 안에서 나는 ‘복음 선포로서’의 길잡이의 소명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켜보고자 한다. 복음 선포로서의 길잡이의 소명은 우리에게 하는 세상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하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복음화에 자신을 봉헌하도록 불리움 받고 있다라는 교회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의 광채 108)

 

왜 내가 복음화에 있어서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려 할까? 단순하게 그 이유를 대답한다면 이점이 바로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꼭 이 부분만 부족한 것은 아니다.  성서,  전례, 교회, 성사, 도덕, 종말론 등에 대한 우리 안의 의식과 그리스도인다운 양성도 적절하지 못하다

 

새로운 교리서에 풍부한 교리들이 담겨있지만 이 교리서를 대충이라도 읽은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회칙 『진리의 광채』를 도덕적 삶의 기준으로서 진정으로 성찰해 보고 있는가?

 

하지만 이런 부조화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게 요청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감각을 지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하느님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은 아니다. 지금의 우리 문화를 살펴보면 우리는 하느님을 쇼핑센터와 같이 상업주의적인 목적이라면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일 수 있는 잡동사니 취급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하나의 잡신처럼 취급하고 있다. 하느님을 새장 속에 가두어두고 개인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런 하느님은 우리 기준대로 만든 잡신에 불과하다.


 
일찍이 예언자들이 가졌던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우리 가운데 찾아볼 수 있을까? 예언자들은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격렬한 비난을 쏟아 부었다. 우리는 시편 104편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이 시편 저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 불어넣는 광채(시편104)에 놀라고 모든 것을 품어 안고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이 가까이 계심을 황홀해 하고 있다. : “야훼여, 당신은 나를 환히 아십니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 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시편 139)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활동에 관심을 돌려보면, 우리가 경외와 찬양으로 하느님 앞에 무릎 꿇는 모습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에페 3,14)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2,4-6)

 

혹은 어려움에 짓눌려 있다고 느낄 때 우리의 모든 희망을 넘어서서 바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우리가 현재 멀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바오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까. :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우리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5-39)

 

만일 우리가 여전히 성장해가고 팽창해 가는 우주의 모습에 비춰 하느님을 본다면 - 우주는 초창기 “빅뱅”이래로 150억년 동안 팽창해 오고 있고, 수만의 은하계가 형성되었고, 하나의 은하계가 만들어지는 데는 30억년이 소요되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의 태양은 10억년 동안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우리는 하느님을 “시계공장장”이나“마술사”처럼 생각하는 관념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우주론은 인간을 진화의 중심이며 목적, 우주 진화의 통합적인 정점으로 더욱 더 뚜렷이 바라보고 있다.

우주가 지금도 여전히 성장하고 팽창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들의 감각과 관념은 요지부동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렸을 때 입었던 옷으로 지금 입으면 우스꽝스럽게 되는 옷과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40년 전에 Hurtado신부님이 했던 얘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다.

그들은 아이 때 부모로부터 배웠던 것을 잊어버릴 수 없다.

단지 ‘하느님’ 이라는 말 자체에 익숙해 있다.  이 말이 일상화되어 왔고 여기에 익숙해 있다.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달리 말하면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공허한 개념에 만족하거나, 거대하고, 경외스럽고 두려운 존재로서

하느님을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분을 부르면서도

그분의 크심과 그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을 알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 무난한 분이다. 하느님의 존재는 자신의 삶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분은 너무나 큰 산과 같아서 접근할 수 없는 분이다.

그분은 멀리 떨어져 있는 화산과 같이 그 존재를 인식할 수는 있으나

별로 걱정할 필요 없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때에 따라서 하느님은 편안한 정신적인 도피처와 다르지 않다.

세상에서나 자신의 삶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모든 일을 가지고 하느님에게 욕을 퍼 붓는다.

하느님이 그렇게 하셨다느니, 이게 하느님의 뜻이라느니.

                    

때때로 사람들은 하느님을, 곤경에 빠졌거나, 아쉬운 것이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기꺼이 도와주는 이웃사촌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기도한다.

즉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맘씨 좋은 이웃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존으로 들어가거나 친밀하게 함께하시는 하느님께는 다가서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즐기려고 한다.

사람들은 조용한 시간이 오기 전까지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꺼버리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하지만 조용한 시간은 오지 않는다.

절대로 오지 않는다.

 

만연된 이런 분위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물질주의, 혹은 물질주의와 다름없이 물들어 있다.

우리들은 입술로는 그분을 선포하지만 매일의 생활에서는 그분과 거리가 멀다.

우리들은 여러 직장에서, 집에서, 일에서, 사회생활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은 이방인들과 다름없다.

기도도 없고, 교리 공부도 없으며, 자선을 베풀 기회도 없고 정의를 실천할 시간도 없다.

때로 우리 삶이 공허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는가?

우리는 같은 책을 보고, 같은 쇼 프로그램을 보며, 인생과 사건들, 이혼, 피임, 파경에 대해서

무신론자들처럼 똑같이 판단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당연한 것들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왜곡시키기도 한다.

양심, 신앙, 희생정신, 사도직등. 이 모든 것들이 피상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순전히 물질적인 삶을 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세례 받은 사람들이 희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죽음과 비탄에 직면하고 있는지 !

 

              우리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영혼의 파탄, 허무주의, 고독, 자기연민,

        심지어 광기들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세계의 열매가 아닐까?

 

성 어거스틴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오 주님 당신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 안식할 때까지 불안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아서”, Lavin 지음, 16-17쪽)

 

하느님의 현존을 포기한 오늘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후에

Hurtado 신부는 하느님의 걱정거리에 대해 얘기한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하느님 없이 살 수 없다.

사람들은 해바라기가 자연스럽게 해를 바라보듯이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찾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분을 찾을 때, 그들의 생명은 든든한 바위 위에 쉬게 되며

그들의 영혼은 아버지의 신성 안에 머물게 된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처럼.

 

 

 

결론 :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길잡이로서의 사명을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이 하느님에 대해 느끼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초대하고 싶다. 은총의 성삼위의 첫위이신 아버지께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 - 왜냐하면 그분이야말로 만물의 근원이시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려는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

 

 

 

※ 편집자 주 : 이 글은 progressio에 실린 Ochagavia 신부의 글을 옮긴 것이다. 총 4회의  내용 중 세 번째로, Ochagavia 신부가 여러해 동안 걸친 신학적, 사목적인 반성의 열매를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글들은 영성 - 사도적 그리고 이냐시안으로서의 -을 신선한 시각으로 드러내 주는데, 개인 기도와 공동체의 성찰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으로 이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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