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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 우리 기도의 원천, 목적, 그리고 열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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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9-26 17:11 조회6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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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 우리 기도의 원천, 목적, 그리고 열매 -

                                                                                                        프론호펜

 

 

기도란 무엇인가? 한 종교 백과사전에서는 기도를 기능적인 측면에서 “모든 종교의 심장이며 구심점”이라고 정의한다. 다른 사전에서는, 각 종교에 나타나는 기도는 “인간이 신성을 향하여 마음을 모으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정의는 초월적인 존재를 향해 마음을 모으는 것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이것이 아마 가장 보편적인 정의일 것이다)
  실제로 이처럼 말로 혹은 노래로 표현하든 하느님에 대한 지향은 언어를 매개로 전달된다. 하지만 일상의 대화에서 혹은 특별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이렇게 언어로 표현되는 것만 가지고 ‘기도’라고 한정짓는 것은 그다지 올바르지 않다. 이 경우 기도라는 말의 의미가 축소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지향하고, 신성을 지향하는 (예를 들어 비인격적인 초월성) 것은 춤을 출 때나 명상을 할 때, 무아지경에 빠져 있을 때나 일을 할 때, 예술을 통해서나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 안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 안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전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과 함께 한 체험이야 말로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안다.
  기도의 의미를 단순히 언어를 통해서 하느님이나 신적인 존재로 지향하는 것이라고 한정해서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신성과의 관계 중 오직 외적인 모습만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기도를 신앙 성숙 단계에서 초보적인 단계인 것처럼 격하시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나 공동체가 다양한 형태로 기도할 수 있을 때 신앙 성숙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말로하는 기도뿐만 아니라 보다 다양한 형태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 우리 온 삶이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

  루가 복음사가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루가 18장 9절 14절) 이 이야기는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단순히 기도하는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명확한 성격이나 태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세리의 기도에서 베어있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세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청한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모습에서 이미 하느님의 성령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자신을 이끄실 수 있도록 준비 하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며, 위의 세리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치유해 주시는 거룩한 하느님의 성령에 순명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훌륭한 기도를 할 수 있는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 전제를 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 성숙 단계에서 초심자라 할 수 있다.

 

성부 하느님께 기도하기

  하느님과 외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는 단계에서 보는 성부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뒤받침해 주시는 분이지만, 한편으로 기준을 만들어 판단하고 은총의 선물을 주기도 하고 거두어 가기도 하는 분으로 보게된다. 하느님을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하느님의 성령과 함께 해야만 하느님을 보고, 체험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이런식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게 되면, 자신의 창조를 감사드리고 찬미하면서도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고 더 나아가 기도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알려 달라고 청하게 된다. 
  물론 기도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조르면서도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해 가시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하느님은 이 세상의 운명에 대해 책임지는 분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자신의 삶과 죽음에 어떤 이익을 주는지 알고 싶어한다. 이익이 있을 때야 기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도의 유용성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야기를 들려 줄 필요가 있다.
  기도(예를 들어 청원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영혼을 하느님 앞에 들어올리는 것이다.
  스위스의 신학자 오토 카러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께 어디로 향해 달라고 청하거나 혹은 인간의 청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시고 그 쪽을 향해 계시다) 기도란 그 반대다. 인간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청원 기도의 특별한 ‘은총’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역을 깨고 나와 기도하는 사람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는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을 하느님께로 들어올리고 완전한 구원을 바라는 것이다.

 

예수를 통한 기도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어느 정도 성숙하게 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자리잡게 되면 비로서 깊은 신앙 성숙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때 기도는 자신을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부탁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것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기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적인 구원의 관점에서 기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 존재와 피조물의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청하게 된다. 한 편으로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에 앞서 자신의 영적인 죄에서 해방되는 것만을 우선적으로 바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자기비움과 성찰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깊이 헤아리게 되고 이 구속사업을 확장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드린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세상에서 개인적인 구원만 따로 이룬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례적으로 보면 우리는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 하느님께 우리 기도를 전달할 필요는 없다. 사실 우리에게는 기도를 전달해 주는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고 얘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우리 마음을 전달해 줄 중재자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기도한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드러나게 된다.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전달해 주는’‘책임을 지고 있는’분이 아니다. 그 분은 오히려 기도의 질에 책임을 지시는 분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더 이상 하느님께 적들을 쳐부수기 위해 군대를 보내달라거나 혹은 절대 권력을 달라고 청하지 않게 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이미 부름 받은 사람이 보다 친밀하게 하느님을 알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더 나아가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힘, 즉 성령을 체험한 신앙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만이 가장 옳은 방법으로 인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이런 체험은 기도에 대한 폭넓은 전망과 다양한 형태를 깊게 깨닫는데서 얻어질 수 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순수성이 최고로 성숙한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이런 체험이 영원하거나 확연할 수 만은 없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이런 체험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드문드문 주어지는 것임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 전 인성에 영향력을 미쳐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성령이 영향력을 끼친다고 해서 우리 인격이 위협을 받거나 파괴되거나 조각나지 않는다. (두가지 특성의 그리스도론 참조) 오히려 성령이 우리 안에 영향을 미칠 때 우리 인격은 보다 깊은 차원에서 형성되게 된다. 하느님의 치유하시는 힘인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규범이나 규칙, 계명을 부과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자신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인격에서 약점이나 결함을 없애고 우리의 인격이 창조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한다. 우리 인격을 적극적으로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하느님의 치유의 성령께서는 우리를 우리 자신을 보도록 이끄심으로써 우리 시대가 얘기하는 ‘자아실현’을 넘어서서 우리가 지향하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도록 한다(목적 지향적인 방식하고는 딴판으로).

   현실적인 관점에서 말할 필요가 있다. 성령이 “판에 박힌”그리스도인들이나 얘기한 모든 것을 받아드릴 준비가 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믿는 이들이 성령을 증언하고 성령과 함께 삶을 나눠야 한다. 오늘날 서부 유럽은 교회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지성적인 표징이 되고 있는 하느님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위기는 하느님의 위기의 한 징후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만일 신앙인들이 우리 교회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보다 진지하게 받아드리지 않고 있다면 교회의 구성원들이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성령 : ‘우리 기도의 길잡이’

  언뜻 보기에 성령을 ‘우리 기도의 길잡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안다. 무엇이 우리를 상처 입게 했는지 안다. 삶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왜 기도하는데 길잡이가 필요한 것일까?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성령이 없다면 우리는 힘없고 약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26-27)
  우리의 죄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죄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선인지 또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더 이상 인식할 수 없게 되지는 않을까? 만약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징표는) 돈과 권력과 미와 젊음이라고 속이고 얘기 함으로써 우리를 진정 구원과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이렇게 방향이 잘못 정해지게 되는 이유는 죄 때문이다. 성서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치유하시는 힘인 성령만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고 새로운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하느님의 성령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올바르게 기도하는 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요한 14장 26). 그렇지만 이 말이 우리가 죄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오히려 우리가 성령과 신앙이 살아있는 곳으로 갈 수 있고 가야한다는 것을 얘기해 준다. 
  결국 이런 점이 바로 우리교회가 오점과 흠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필요가 있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다. 사실 우리 교회의 오점과 문제점에 적지 않게는 우리들이 끼친 영향도 크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는 다른 믿는 이들과 함께 공동체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나날이 튼튼해지고 성령의 활동 안에서 다시 방향을 잡아나가게 된다. 이런 공동체가 필요하고 의미가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신앙 공동체와 멀어져 있던 사람들이 이 공동체를 보고 칭찬할 수 있게끔 애써야 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만일 개개인이 분별있게 잘 활동하고 있는 신앙 공동체에 - 세상에서는 늘 위협받는 공동체- 소속되게 될 때 하느님의 활동하시는 성령은 이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스며 들게 된다. 또한 어디에 진실한 삶이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끌어가는 곳이 어디인지 점점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오직 사랑만이 정의와 자유, 평화, 기쁨 그리고 폭넓은 구원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우리를 깊게 매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을 체험을 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을 만날 때 어떻게 기도할 수 있고 그리고 어떻게 기도 해야하는지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성서에서나 신학 전통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 하느님의 성령만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영혼과 천사들 역시 지속적으로 기도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기도는 성령의 힘을 보여주는 징표다”C.H 레스초우(Ratschow). 이슬람 신비주의에서는 기도 안에서 알라신이 직접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 신학자 P. 쟈끄몽(Jacquemont)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기도의 우선적인 대상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하느님의 자녀를 만든다.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새롭고 고유한 방식으로 기도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기도 그 자체이며,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어린애처럼 ‘새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14절-16절).
   따라서 우리는 성령과 함께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고, 또한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과 내적인 관계, 자녀 같은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하느님의 성령을 통해 기도하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예수의 기도 방식을 따라가게 된다. 물론 이런 관계는 우리 죄 때문에 항상 위협을 받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처럼, 하느님과 자녀의 관계를 갖게 되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성서는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자녀의 관계에서 보다 더 한발 나아가도록 한다. 복음서에 따르면 하느님을 알게 되는 데는 단계가 있다. 먼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다. 둘째로 우리 안에 자리한 성령의 기도를 통해 알게 된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전통 신학에서는 ‘하느님은 영이시다’(요한 4장 24절)라는 말을 단순히 하느님은 물질적인 분이 아니시다라고 한정해서 받아드렸다. 전통신학에서는 하느님에 대해 인식하기 위해서는 물질 세계의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영적인 영역으로 관심을 옮겨가야 한다고 보았다. 비물질적이거나 이성적인 영역이 실제적인 세계였다. 이런 바탕에서 오해가 생긴다. 특히 이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책임이 있다. 사람들은 철학이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열쇠를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인의 신비까지 이해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성서에 전혀 나와있지 않다.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릴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요한 4장 23절 - 24절).
    하느님께서 영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구분하는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영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을 통해서 기도한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하느님의 성령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을 배운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영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하느님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전 삶이 기도다.

  우리의 전 존재가 완전히 하느님의 성령으로 변화되게 되면 우리는 신앙 성숙 단계에서 정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말이나 행동에 매여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의 전반적인 삶이 점점 더 하느님께 향할 수 있게 되고, 또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가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이 부분에 대해서 강조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알고 이에 맞갑게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특정한 시간에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 삶을 기도를 통해 하느님에게 향하도록 한다. 그리고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역시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죄악과 싸우는 일상의 전투이며 마침내 기도 안에서 우리는 성삼위의 빛을 발견하게 되고 근원적인 성령 안에서 자신의 빛을 보게 된다.”비슷하게 존 카시안은 이렇게 얘기했다. “기도의 절정은 ..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얼굴을 볼 때이다.” P. 쟈끄몽(Jaquemont)역시 이렇게 표현했다.
  성령이 세례받은 사람의 전적인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리고 성령은 이 삶 자체가 이 하느님이 살아있는 예배가 되도록 변화시킨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예배는 우리의 전 삶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쓰는 ‘희생제물’이란 말을 오해할 수 있다. 교회 전통을 통해서 희생제물이라는 것은 자신의 계획이나 삶의 여러 가능성을 펼쳐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삶에서 자신의 성공을 버림으로써 다른 도덕적인 잘못을 보속 하려는 목적을 갖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인간 관점에서 이런 생각은 모호하다. 희생이 의미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전 삶을 온전히 하느님의 성령께 순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해방과 성취를 찾아가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은총의 상태’  
  우리 삶이 하느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 결과로 우리의 전 삶은 기도가 된다. 전통적으로 이런 단계를 ‘은총의 단계’라고 불렀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이런 ‘은총의 단계’를 ‘생명의 힘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즉, ‘생명의 힘과 조화를 이루는 삶’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안에 최고의 삶의 형태로 표현되고 고백되었던 것이다. 이런 삶을 통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되고, 이렇게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야 말로 우리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성취인 것이다. 몇몇 교부들은 이런 은총의 단계를 ’작은 부활‘이라고 표현했고, ’부활에 앞선 부활‘이라고도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은총의 단계를 전통적인 개념인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했다. ‘영원한 생명’을 물리적인 생이 끝난 후에 시작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들나 철학자들이 있다. 성서에서는 영원한 생명은 이미 우리 삶 안에 있다고 표현한다 (루가 11장 20절, 요한 5장 24절, 17장 3절 로마서 6장 7절, 골로사이서 2장 12절).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치유하시는 힘이신 성령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삶이며 이미 우리 삶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죽음조차도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아닌 것이다. .☼

 

※ 편집자 주 : 이 글은 신학 다이제스트(Theology Digest) 1999년 봄 호에 실린 프론호펜의 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도의 최고 목적은 믿는 이의 전 인격이 하느님의 치유하시는 힘 즉 성령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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