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로 살아가는 삶 (2) > 마중물

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나눔터
- > 나눔터 > 마중물
마중물
마중물

평신도로 살아가는 삶 (2)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10-21 11:54 조회555회 댓글0건

본문

일상생활을 내적으로 이해하고 맛보기 - 평신도로 살아가는 삶 (II)

 

    또 우리의 삶의 질은 삶이 단순한가, 단순한 경제생활을 하고 있는가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소비지향 사회에서 장려하는 삶의 모델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외적으로 부를 과시하고, 남들에게 자신의 이미지가 잘 보이도록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물론 하느님은 사람들이 삶에서 적절히 자신의 위치를 찾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모든 평신도는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일하고,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면서 가족을 꾸리고 직업을 통하여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얻을 권리가 있다. 그 누구도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연 기본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과 소비지향주의 때문에 생겨난 필요를 구분 짓는 경계는 무엇일까? 우리는 근원적인 삶의 형태를 선택하고 일상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적절히 식별함으로써 이 경계를 찾아가게 된다. 우리의 삶이 단순한가라는 문제를 식별하는 기준은 가난한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이다. 성 이냐시오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이들은 “영원하신 왕의 조언자”들이다. (파두아에 있는 공동체에 보낸 편지). 가난한 이들은 영원한 왕의 조언자들이기에 이들은 우리의 조언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분명 가난한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현실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삶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면, 우리가 단순한 삶의 방식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멀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나는 근원적인 선택에 대해 언급했다.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서약을 한 평신도들에게 이 선택의 의미는“다른 사람 중심으로”역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사명이다. 이것이 복음적인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며, 성 이냐시오는 이것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사람은 더욱 더 자기애, 자기 의지, 자기 이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영성 수련 189)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개인주의를 칭송하고, 서로 연대하기 위한 계획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고, 패션이나 삶의 양식을 선택할 때 자기애와 나르시시즘이 계속 자극받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영성이 자기 위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으로, 성장을 포기하고 있다. 내 일상의 삶이 나 중심적인지 다른 사람 중심적인지, 삶에서 나의 소명이 나와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곳에 있는지, 내가 일상에서 살아가는 여러 영역에서 성서 말씀을 구현하려는 열정이 있는지, 내 중심을 어디에 세우고 있는지 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삶의 역량과 질을 드러내는 또 다른 특징은 감사이다. 생활에서, 사명을 살아감에 있어 늘 엄격함을 강조하고, 감사하는 것을 어딘가 모르게 활동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 될 때 우리는 사람들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게 되고, 적절한 기회를 가질 뿐만 아니라 함께 해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자기중심적인 목적으로 일 해가는 것을 지양함으로써 표출되는 감사, 소비주의 사회에서 장려되는 “내가 너에게 해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해주어야지”라는 정형적인 태도를 버리는 감사다. 이 감사는 성공이나 승리에 집착하지 않는 감사이다. 오히려 봉사하며 살고, 필요한 것들에 대한 감사이다. 모욕을 당하고, 관심을 못 받고,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일상의 이런 상황에서 성 이냐시오의 두 개의 깃발을 본다.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의 들판을 이렇게 표현한다. “낮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영성수련 144번) 그런데 여기서 매력적이라는 것을 그저 끌리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끌림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말하는 매력적인 것은 우리 삶에서 감사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 삶의 질을 규정하는 것들은 이 외에도 많이 있다. 이 중에서 나는 대체로 그리 강조되지는 않지만 이제까지 제시했던 기준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유머 감각이다. 사실 유머 감각은 영성이나 교계적인 삶의 형식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유머 감각이 우리 삶의 질을 훨씬 많이 향상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머와 웃음은 우리가 삶에서 정말 지난하게 겪는 많은 삶의‘질곡’을 덜 힘들게 해 주고, 우리가 때로는 잘 이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많은 오해들을 사기도 하는 삶의 다양한 관계들을 보다 유연하게 살아가게 한다. 유머는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아주 좋은 윤활제이다. 적절한 농담과 웃음으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삶에서 배우이면서 관객이 되고, 우리가 겪는 상황에서 거리를 두게 되어 상황과 사물들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집착을 상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유머는 상황을 피상적으로만 보고 가볍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유머는 건강한 지혜의 표징이다. 아루뻬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다른 사람과 농담하고 웃는 것을 좋아한다면 오세요...... 당신을 놀리며 웃을 때에도요......”우리 사람들은 유머감각과 독창적인 반응과, 재치 있는 말대꾸와 기지로 행복을 표현하고, 축제처럼 감사하면서 우리에게 아주 깊고 보편적인 지혜와 따뜻한 삶의 느낌을 표현한다. 

 

     아루페 신부는 이렇게 통합적이고, 자신을 받아들이며, 삶을 단순하게, 다른 사람 중심으로, 감사하게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유지하는데 디딤돌이 될 만한 말을 했다. “자신을 훈련하는 목적은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알고 책임있게 살아가기 위함이다.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것이 아님을 굳게 믿으면서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으로서 겸허하게 수확해나가는 것이다. (복음의 특징을 드러내는 원리와 기초에 나온 것처럼 모든 것들을 활용하기.) 이냐시오의 말을 빌자면 이것이 곧 자기를 주관하는 것이다. (영성수련 216번) 


기도 :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격자

 

 뜨겁고, 강렬한 영적 체험의 순간(피정 등 - 역주)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도 자신의 내적인 힘을 유지시켜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도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냐시오는 우리 기도와 영성 생활 전체의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했다. “좋은 것에서 더 좋은 상태로 성장하고 향상하게 하려는 것”(영성 수련 331번)이다. 이런 성장은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는 굴곡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영성적인 삶을 살아갈 때조차 우리는 정체되거나 퇴보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기도하려고 애쓸 때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끊임없이 위로 향하는 역동성이 살아난다. 우리의 삶과 통합된 기도의 힘과 질은 이러한 역동성을 통해 드러난다.  

 

     때때로 우리는 기도를 하루 일과에서 채워 넣어야만 하는‘일’처럼 여긴다. 기도 시간을 프로그램처럼 짜놓고, 그것을 “채워나가려고”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기도를 “해내야”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이런 시간을 가지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평신도의 삶에서 이는 참 어렵다. 만약 우리가 기도를 성취해야할 대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그저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면 삶에 대한 내적인 힘과, 기도에 대한 내적인 힘을 키울 수 있다. 


의식 성찰 : 깊이의 영역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움직임을 보면 일상에서 삶의 깊이가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새로운 것과, 말초적이고 피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깊이가 살아나야 한다. 아루뻬 신부는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에서“성찰하지 않는 체험은 살아있는 체험이 아니다.”라고 표현했다.“삶을 산다”는 것은 피상적이고, 사소한 것에 흥분하면서 열을 내는 것이 아니다. 삶을 깊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루 중 성찰의 시간은 그 날 있었던 것을 다시 사는 것이다. 날마다 내적으로 울렸던 것을 다시 떠올리면서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울림들을 보는 것이다.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성스러운 자리(성소)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맞닿아있는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이냐시오의 의식성찰을 “일상안의 짧은 멈춤”이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사실 이 말은 애매한 표현이다. 만약 일상에서 바삐 움직이다가 단절해서 괄호를 치듯 따로 떼어내는 것이 기도라고 이해한다면, 기도는 그저 경건한 활동으로 현실에서 벗어나게 될 위험이 있다. 기도가 평화 가운데 영적인 일치를 이루는 시간이라면, 즉 하루를 하느님의 눈으로 보려고 하는 것(하느님께서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가)이라면 이 때 기도는 우리의 일상을 더 깊게 만드는 은총의 시간이다. 삶에서 스타일과 피상적인 대화나 외형적인 것만을 부추기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평신도들은 깊은 영성을 살아감으로써 이 시대의 문화를 거슬러갈 수 있다. 아루뻬 신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냐시오의 의식 성찰은 한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움직임과, 자신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어야 한다. 의식 성찰은 결과를 통해 나의 마음에 이야기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움직임을 식별하는 것으로서, 필요한 인간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식별 : 영들의 집

 

     “일상의 삶 안에서 식별”한다는 것은 중요한 결정이나, 중요한 선택을 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열정을 다해 식별하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 반복되는 패턴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런 것들이 성령에 의해 어떻게 풍요로워지고, 악령에 의해서는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식별의 기준, 특히 영성수련 333번과 334번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신다. 이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냐시오는 기도와 여러 활동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성찰에 대해 부지런히 설명하고, 자서전에서도 성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냐시오는 우리에게 반복되는 패턴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초대한다. 우리는 반복적인 생각뿐 아니라 반복적인 충동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통 첫 번째 충동은 원초적인 것이다. 우리의 기질,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방어, 우리의 상처, 우리의 선호도 등등. 두 번째 충동은 하느님에게서 올 수 있다. 관대함, 용서, 사랑하고자 하는 힘, 성숙, 자유, 행복...... 식별은 사실상 우리에게 거룩한 영감을 주는 성령의 숨결을 발견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의 삶에서 소소한 영적인 흐름들은 이냐시오의 은총의 공간에서 작은 식별들을 하게 한다. 

 

일상에서의 훈련 : 활동 중의 관상

 

 이냐시오가 평신도를 염두에 두면서 영성수련 19번을 적었다는 말을 했었다. 사실, 평신도가 피정의 집에서 한 달간 영성 수련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 한 달 간 직장에서 휴가를 받고 가족들과 떨어져 있기가 쉽지 않고, 30일 피정비는 대부분 평신도가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30일 피정은 그 자체로 좋고, 유용하다. 하지만 그저‘좋은 줄은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지’라며 꿈꾸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일상생활 가운데 영성 수련”을 하도록 준비하는 것이 낫다. 수도원에서가 아니라 삶 안에서 온전히 또 깊게 관상을 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평신도들에게는 19번에 의한 영성 수련이 가장 적절하며, 신문에서, 잡지에서, 가족 간의 대화에서, 직장 문제에서, 친구들과 만나는 술집에서, 시장에서 기도가 시작되고, 우리들은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세상을 본다. 세상에는“흰 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평화 가운데 있는 이도 있고, 전쟁 가운데 있는 이도 있고, 또 우는 이도 있고, 웃는 이도 있다”(영성 수련 106번) 더 나아가 19번에 의한 영성 수련은 매일의 활동 가운데 관상할 수 있는 힘을 더 키워준다. 만약 사람들이 “일상”가운데에서 훈련을 받는다면, 이들은 진정으로 영성적 삶을 살아가는 은총을 받을 수 있다.

 

     이 글은 일상의 삶을 감사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적은 짧은 단상이다. 나는 이 글이 우리 영적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를 소망한다. 마치면서 나는 매일의 영성을 깊게 살아가도록 아루뻬 신부가 한 짧지만 열정적인 성찰의 글을 나누고 싶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 보다 더 실제적인 것은 없다.

 

하느님을 찾는 것보다 더 실제적인 것은 없다.

다시 말해, 온전히 사랑에 빠지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

그대가 사랑에 빠진 것이,

그대를 사로잡는 꿈(상상력)이 모든 것에 영향을 준다.

그대를 아침에 일어나게 하고,

그대가 저녁에 할 것을,

어떻게 주말을 보낼지를,

무엇을 읽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이 그대의 심장을 뛰게 하고

무엇이 그대를 경이롭게

행복과 감사로 채우는지를

결정한다.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머물러라.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 세계 CLC의 영성잡지 프로그레시오에 실린 페루 영성 센터 하비에르 우리아르트 신부의 글입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histian Life Community     -
희망학교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