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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삶(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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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5-23 15:12 조회5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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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계획의 핵심적인 것 단지 몇 개밖에 언급할 수 없다. 나머지는 독자인 여러분에게 달려있으며 우리와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이 설명을 차분히 경탄하는 마음으로 더 묵상하기를 바란다.

 

1. “나는 너희를 위하여 몸소 마련한 계획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예레미아 29:11)

 

실제로 계획은 존재한다. 이는 세계적인 계획이며 우주적인 계획으로 모든 인류의 계획을 뛰어넘고, 한편으로 포함하고 있다. 성 바오로는 이를 시대의 완전함을 위한 계획이라고 불렀다. 인류 역사는 수많은 남녀의 계획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때에 따라서 이기적으로 서로 싸움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나 제1세계에 의한 제3세계의 핍박처럼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을 뛰어넘으면서도 이들을 포괄하는 신성한 계획이 있고, 이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모든 인류의 선을 증진시킬 수 있는 계획,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계획이다.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이사야 61;7)가 바로 이 계획의 목표이다. 동구와 서구, 남과 북의 정치인들이 인류역사에 만들어 놓은 세계 질서를 뛰어넘는 신성한 질서가 있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빌면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면서 시작되었고, 모든 희망과 약속을 완성한다. “나는 내가 너희를 위해 세워놓은 계획을 알고 있으며 이는 파국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계획이며 너희를 위한 희망이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2. 복음은 기쁜 소식

 

이 계획을 드러내는 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모든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다. 사도 바오로와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흥분시켰던 것은 인류 역사가 혼돈과 공허함과 죽음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바꿀 수 있으며, 예수의 부활로써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표면적인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제 희망은 단순히 을 생각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만이 아니라 힘없고, 버림당하고 죽거나 죄인이라고 불리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정당화된다. 가장 비참하고 절망한 사람들조차 여기 포함될 수 있다.

복음은 기원 후 1세기에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역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살던 바로 그 세계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이 세상은 희망이 없고, 각박하며 혼란스럽다. 불행은 중첩되고 사면초가에 갇힌 인간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속가능한 진보라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야말로 성삼위가 끊임없이 보살피고 있는 세상이다. 성삼위는 우리들에게 절망하지 않으신다. 최근 발견된 한 고문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하느님은 살아계시고 잘 지내시며 그렇게 내키지 않는 계획을 진행하고 계신다.” 하지만 그랬다고 성삼위가 과거보다 의욕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성삼위는 변하지 않는다. 꾸준히 침착하게 일하신다. 계획이 바뀌는 일도 없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의 마음을 잡아야 하며 이에 따라 우리의 방향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성삼위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토록 친절하게 만들어 놓으신그 계획을 보다 충실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계획을 조금이라도 맛보는 것은 큰 특권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우리 형제자매들과 나눔으로써 그들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궁극적인 단일한 사랑의 공동체

 

이 계획의 핵심은 단일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성삼위의 열망이며 이 공동체 안에서 신성과 인간성은 기쁨 안에서 하나가 된다. 신약에 나타난 상은 주인과 손님이 한 자리에 앉아서 함께 기쁨과 우정을 나누는 최후의 만찬에 잘 나타나 있다. 유엔에서 발표한 지구 공동체에 관한 성명은 성삼위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모습을 미약하게나마 반영하고 있다. 우리를 위한 신성한 지향의 실천은 철저한 것이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은 서로 파괴하기 위해서도, 지배하거나 압제하기 위해서도, 핍박당하거나 테러를 가하기 위해서도 이나다. 성삼위가 의도했고 결국 이루어질 모습은 실없는 소리와 분노로 가득찬 이야기가 아니라 전 우주 안에서 울려 퍼질 행복과 기쁨의 합창이다. 눈물의 법 아래에서 일해 왔던 우리들은 웃게 될 것이다. (루까 6:21) 그러면서도 남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우주적인 기쁨이 우리 모두를 포용할 것이다. 한없는 기쁨이 모든 인류의 얼굴에 가득할 것이다.

 

4. 성삼위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 계획은 성삼위가 인류에게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성삼위의 선택과 축복, 관심의 대상이다. 아마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중요치 않은 존재라고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큰 일도 우리 삶에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단순히 흘러가는대로 살아가고 있으며 세상의 일에는 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받았다. 성삼위의 마음은 우리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들의 한없는 풍부한 은총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열려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태초부터 전적으로 사랑받았고, 우리의 존재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며 이 사랑은 우리가 설령 선하지 않는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 사랑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있으며 세상 안에서 일한다. 이 사랑의 활동은 변화시키고 있다. 성삼위의 사랑은 우리의 응답을 갈망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응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하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강해서 우리의 희망이나 꿈을 뛰어넘는 거대한 목적을 수행해나간다. 이 사랑은 꾸준히 활동하고 한없이 풍부하다. 우리 각각을 존중하고 선하건 악하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저질러놓은 악함을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하시고 선한 것을 끌어내려고 노력한다.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가 죄를 이겨내고 뉘우치며 사랑하게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성스러운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조차도 하느님 구원의 손길로 변화될 수 있고,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역할을 할 수 있다.

 

5. 효과적인 계획

 

이 계획에서 희망하는 성공은 무엇일까?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악한 세상에서 선을 위해서 싸우는 미약한 힘들은 잘 훈련된 어둠의 군대보다 숫적으로 열세하고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불의와 폭력의 압제적인 구조는 여기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계획은 끊임없는 원천의 지원을 받고 있다. 성삼위는 그들 자신을 이 계획에 완전히 투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삼위는 우리들이 지닌 공포를 밀어놓고 그들과 함께 우리 세상을 변화해나가고 궁극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작업에 참여하도록 한다. 우리는 쉽게 성삼위가 전능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성찬례 서문) 성삼위는 결코 패하지 않는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하느님께서 우리편에 서 있는데 누가 우리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로마서 8:31-39) 성삼위 모두는 자신들의 역할을 휼륭히 행하고 계시다. 성부는 계획을 만들고, 성자는 그 계획의 주역으로 참여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실패하지 않도록 책임을 맡고 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의 통제밖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에게 놀랍거나 충격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예상되지 않는 것도 없다.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은 비록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는다고 해도 그분이 허락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가장 나쁜 모습조차도 인정하시고 여기에서 선을 가져오신다. 마치 악의 절정이라고 할 성자의 죽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서 사랑의 보편 공동체를 이루시는데 가장 큰 두 개의 방해물은 죄와 죽음이다. 이 둘은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이 떠 맡는 몫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죄와 죽음은 극단적으로 극복된다.

 

6. 하나의 단일한 계획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단지 영적인 측면에만 관심을 가지고 먹을 것, , 주택 저당 담보나 생활비 등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오직 하나의 계획만을 갖고 있다. 아무리 이 세상이 방대하다고 해도 하느님의 계획은 모든 사건, 사람, 장소, 사물을 포괄하고 있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으며 우리의 선을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하시면서 끊임없이 이를 추구해나가고 있다. 하느님은 인류가 하느님을 위한 없앨 수 없는 열망을 갖도록 하셨다.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모상이며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대로 인류의 마음은 하느님 안에서만 쉴 수 있다. 창조의 모든 구체적인 것들은 성스럽다. 모든 것들이 우리를 돕고 우리를 이 계획과 조화를 이루도록 이끌어나가는 한 쓰일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더욱 좋은 것은 그분이 우리를 만나러 먼저 다가오시고, 우리 앞에 놓인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또는 피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우리 세상은 하느님으로 가득차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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