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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삶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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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6-26 16:45 조회5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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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생각하기

 

앞서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찰은 단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또는 성삼위가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계획 자체에 대해서 성찰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임을 밝힌 바 있다. 물론 우리의 성찰 안에 이런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차원이 있다. 성서에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들을 성찰하는 작업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며 매우 역동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서 성찰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마음과 가치를 바라보고, ‘그리스도가 살았던 바로 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요한 126)

다른 사람의 선익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마음먹은 선의의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다. 이 세상 안에서 일이 이러이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단순한 생활방식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고 어떤 대가를 치르거나 어떤 일을 감수해야 하더라도 자신들의 능력과 선물 안에서 최대한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고 자신을 개방하는 사람들, 항상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 이렇게 하려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은 가치 있고 기쁜 일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이고, 예수께서 살아가셨던 삶이다. 우리는 예수를 성찰하고 그의 마음과 정신, 태도를 성찰하면서 실제로 생활 안에서 이를 살아가야 한다. 예수는 선을 행하면서 사셨고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편지와 거울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새로 창조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갈라디아서 615) “그러니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고린도 2517) 그는 편지와 거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우리는 편지를 쓴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알게 된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에 보내진 그리스도의 편지로 사람들은 우리를 읽으면서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을 알게 된다. (고린도 233) 거울의 비유에서 말하고 싶은 바도 같다. (고린도 2318) 예수는 성부의 모습을 완전하게 보여 주셨다. 예수는 이 세상에 아버지의 의향을 그대로 드러내셨다. 예수는 필립보 사도에게 누구든지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고 말하였다. (요한 149) 우리들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창조되었고, 우리는 평생토록 하느님의 모습을 이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핵심이며 우리를 하나로 모아주고 가장 가치 있는 소명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읽고 있는가 ?

 

이 질문은 듣는 이의 마음을 뜨끔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우리를 읽을, 과연 하느님을 읽고 있는가?” 우리는 이렇게도 질문할 수 있다. “사람들이 과연 내 행동을 보고, 내 말을 들음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나는 사람들에게 조건없는 사랑, 진정한 용서, 열정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가? 사람들이 과연 내가 그들의 편이고, 그들에게 관심과 애정이 있으며, 그들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칠 용의가 있음을 느끼고 있는가?” 우리는 거울이다. 자신을 보면서 우리는 각자에 대해 성찰한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람들과 그들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성찰하고, 세상에 하느님을 드러내게 된다. “하느님의 밝으심을 거울처럼 반영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드러내는 모습과 닮아지기 위해 점점 더 변해가고 점점 더 밝아지게 된다.” (고린도 2318) 이런 하느님의 밝음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춰준다. 우리는 빛나는 별처럼 이 세상을 밝게 비추기를 바라고, ‘어둠과 악의 그늘 밑에서살아가는 사람들을 (루가 179) 돕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마음 안에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가지셨을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십시오” (필립비서 25)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성서 안에서 예수를 볼 때 그리고 기도 안에서 예수를 관상할 때 어떤 점을 보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예수의 삶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어 그는 그 모든 일을 행했고, 고통을 기쁘게 받았는가

예수에게 있어서 이 비밀은 그의 마음이 다른 사람 즉, 성부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완전히 사랑 안에 있었으며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성부야말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이셨다. 어떤 것도 이를 대신할 수 없었다. 성부는 예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당신 계획에 따라 항상 예수와 함께 계셨다. 성부는 선하시며 모든 것이다. 예수에게는 성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하였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베드로나 성모님,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였다. 성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예수에게는 가장 긴급했고, 이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였다. 자신의 삶에 대해 이토록 확고한 태도를 지녔던 예수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그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합니다.” (요한 829)

 

영광

 

예수는 종종 성부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 얘기했다. 이 영광은 중요함”, “위대함”, “뛰어남을 의미한다. - 이들은 위대한 사람들에게 드릴 수 있는 호칭이다. 언제나 완전히 성부에게 의존하심으로써 예수는 당신의 삶에서 성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래서 성부가 모든 것들 가운데서 당신에게 영광을 주셨음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그가 성부와 그의 뜻대로 쓰이는데 모든 것을 완전하게 바쳤다는 사실을 세상 안에 극적으로 드러낸다. 예수는 언제나 이런 태도를 보이셨고, 급기야는 골고타 언덕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매달려 있을 때도 이 태도를 견지하셨다. 이 모습이 성부의 중요성 또는 영광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예수는 우리 역시 이런 생각과 마음의 태도를 지니고, 우리도 모세나 이사야, 에제키엘이나 성모님, 바오로 및 다른 성인들처럼 하느님의 선하심에 사로잡히고 매료되어 우리 자신을 버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성인들은 하느님이 선하시고 하느님의 계획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계획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쁨의 선물을 얻게 된다.

 

시간과 공간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를 사로잡았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천천히 배워가게 된다. “나는 아버지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루가 249) 우리는 점차 때로는 완고하게 저항하면서 우리 안에 하느님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나간다’. 반면 예수는 그 자체가 하느님을 위한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이라고는 전혀 없으셨다. 예수 안에는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할 것이 전혀 없어서 성부는 언제나 예수 안에서 먼저 활동할 수 있었다. 예수는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도 않았다. 우리는 참으로 어렵게 하느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배워 나간다. 그래서 때때로 기도할 시간을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기도 시간을 내지 않는다. 예수는 그 자체가 성부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분이 완전히 투명하셨기에, 성부의 모든 특성과 색깔이 예수 안에서 완전히 드러날 수 있다. 성자는 성부에게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셨고, 자신을 성부께서 쓰실 수 있도록 내어놓았다. 예수 자신의 의향이나 활동이 성부의 뜻에 끼어들거나 방해하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다. 우리는 이러한 비움과 자기 포기(self-abandonment), 가난의 영성을 예수 탄생과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하느님의 영광이 예수를 통해서 밝게 빛나고, 개방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하게 성부가 예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게 된다. 이들 역시 성부께로 이끌리게 되고 성부의 뜻대로 일을 하게 된다. 베드로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만났고, 사랑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그는 누군가 예수의 삶 안에 있음을 즉, 신비스러운 성부께서 예수의 모든 행동을 움직이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예수를 통해 베드로는 성부를 사랑하게 되고, 친구인 예수 안에서 보았던 대로 완전히 개방적인 태도로 하느님께 봉사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의 선을 위해 자유로워지는 것은 은총이다.

 

끝까지(요한 131)

 

예수는 결코 하느님께서 당신께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성부의 요청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예수는 사랑과 인내로 이를 받아들였다. “하느님이 내게 무엇을 더 하실 수 있을까?”라고 최근에 남편과 사별한 직후 아들까지 잃은 한 여인이 불평했다. 사실 많은 사람의 삶 안에 있는 고통은 놀라울 정도이다. 어떻게 예수는 성부께서 요청하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예수는 성부가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모든 것 안에서 완전히 자신을 성부께 내맡기셨다. 성부 역시 예수의 일을 막지 않으셨고, 사랑 안에서 모든 것에 적절한 응답을 하셨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계획은 현명하고 올바르며 적절한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는 열정을 드러내셨고, 이는 엠마오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제자들을 놀라게 했다. (루가 2426) 예수는 성부가 매우 지혜로우시므로 아무리 파국적인 사건이라 해도 이를 통해 이 세상에 선을 가져오신다는 것에 굳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에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예수는 그분이 하시는 일 모두를 완전히 믿고 의지하셨다. 그래서 예수는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을 거울처럼 비출 수 있도록 응답하셨다. 그에게는 이 요청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 자신을 개방해야 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약해져야 하고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으며 비난을 받게 된다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예수는 마치 백지 수표나 낱말 맞히기 퍼즐처럼 성부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고 모습을 바꾸셨다. 예수는 마치 모든 힘을 다하여 빛을 발하고는 스스로는 완전히 타서 결국 없어지는 촛불처럼 자신을 내어드렸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부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행동을 통해 자신에게는 성부가 가장 귀하다는 것을 보이셨다. 이처럼 예수는 성부를 영광스럽게 하셨다. 이에 대해 성부 역시 성자를 가장 귀하게 여기셨고, 예수를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셨으며 그를 영광스럽게 하고 마침내는 주님으로 만드셨다. (필립 29- 11)

 

같아지라

우리는 예수를 보고, 그분 안에서 일어났던 것들을 살핀다. 우리는 사실 다른 사람이 이토록 성부에게 자신을 개방하고 그분께서 쓸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드린다는 사실을 존경하고 놀랍게 바라보며,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예수와 각자와의 차이를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도 예수처럼 될 수 있을까? 예수처럼 인류를 위해 봉사하도록 나를 개방하고 하느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열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이 시대,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더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 성자는 성부께서 이 세상에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 바람직하다고 여기신 방식대로 살아가셨다. 모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 성자는 이미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고 계신다. 그리고 성자의 응답, 즉 성부에 대한 성자의 노래는 우리가 비록 지금은 잘 인식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이미 우리의 응답이며 노래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 축복을 받았기에 (에페소 13)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이다. 성자를 움직이셨던 것과 같은 성령을 받았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삶의 영이 바로 우리 삶의 영이다. 이 영은 성사를 통해 사람이 되신 말씀과 사랑 안에서 일어나고 이해되는 모든 사건 안에서 성장한다. 교회는 우리가 사는 공동체이다. 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선하게 되고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 이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가 우리가 계속 일을 해나갈 힘을 주고, 우리는 이를 위해 기도한다.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받으셨던 모든 것을 받았다. 우리는 다함없이 사랑 받고 있으며, ‘불멸의 다이아몬드’(immortal diamond)이신 성자 안에 있기에 우리 역시 멸하지 않는 다이아몬드이다. 성삼위는 모든 사건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성삼위와 함께 하면 불가능한 상황이 없으며 하느님께서 더 이상 깊게 하실 수 없을 만큼 심리학적으로 부적절한 것도 없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삼위의 이야기가 더욱 바람직하며, 우리 안에 다함없는 은총과 사랑,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준다. “하느님의 영광은 완전히 살아있는 인간이다. 인간의 영광은 하느님의 전망이다.” (이레니우스) 그리스도를 성찰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고 점점 더 완전해진다. 성부의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서 급격히 완성되었고, 성삼위는 우리가 이 길을 따를 수 있는지를 바라보고 계시다. 우리는 각자가 지닌 자신만의 좁고 왜곡된 길에서 벗어나 마침내 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성삼위가 기쁨의 미소를 지으시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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