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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인식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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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7-05 12:05 조회1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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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인식Ⅱ

하느님을 사랑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어지는 글입니다-

 

논의를 더 발전시키지 않더라도 아버지에 대한 선포가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꼭 강조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말 우리들은 죽은 하느님, 즉 하느님을 우리의 모든 실수와 변덕을 받아주는 선량한 노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이런 노인을 통해서 우리는 절대로 확신이나 만족을 얻을 수 없다. 1년에 몇 차례 이런 노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뿐이다.

 

여기에 우리들의 우선적인 복음선포의 과제가 있다. “아버지를 회복하는 것”, 이것은 주의 기도의 첫 번째 구절을 더욱 깊게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즉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또 우리 아버지로서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 한다면, 우리는 성부의 사랑으로 회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먼저 있어야 하며 이는 그분을 사랑하려는 열망과 노력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Hurtado 신부는 자신의 주님이며 모든 작은 주님들의 주님이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늘 그분에 맞닿고 있음을 느꼈다. 다음은 하느님에 대한 그의 신뢰를 적어놓은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나는 한없는 희망으로 충만해 있다. 근심은 사라졌다. 멀리 없어져 버렸다. 그분의 손길에 나 자신을 완전히 내맡겼다. 나는 그분의 것이며 그분은 나는 물론 모든 만물을 주재하신다. 나의 영혼은 끝내 평안하고 침잠해졌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평안의 길을 얻는다. 형언할 수 없는 내 존재의 가장 영적인 부분을 소유했다. 하느님은 모든 풍파를 잠재우시는 굳건한 바위, 하느님은 한점 어둠도 없는 눈부신 광채, 궁극적인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 내 사랑의 완성으로 충만하게 그분께 다다른다. 내 모든 영혼은 그분 안에 있다. 그분의 빛 안에 둘러싸여 있다. 그분의 힘이 나에게 스며든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을 찾아서”, 라빈, 165-166)

 

영성수련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가짐으로써 이런 사랑을 가꾸어 가는 수많은 길을 보여준다. 삼중 담화는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영신수련 54). 삼중 담화는 항상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사랑의 대화로 마무리한다(영신수련 63). 각 관상은 주님의 기도로 끝맺도록 되어 있으며(영신수련 63, 126, 147),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두 번째 방법의 좋은 주제이다(영신수련 252).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은 우리에게 늘 선물을 주시고, 늘 현존하시며, 우리의 수고 가운데 가까이에서 일하시는 이런 아버지와 우리를 친밀하게 한다(영신수련 234-236).

 

영성수련은 사랑은 말보다는 행동 안에 있어야 한다는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영신수련 230). 말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버지 하느님을 말한다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우리 서로가 살벌한 경쟁에 몰두해 있으면서 우리가 유일하신 하느님과 아버지 되심을 믿고,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라는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버지성은 우리의 존재의 모든 행동에 담겨야 한다. 우리 구원을 위해 -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고 하느님으로 충만해지게 하려고 - 죽고 부활하신 성자의 신비체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사회구조, 그 구조를 이루는 모든 구석구석에 하느님의 아버지성이 드러나야 한다.

하느님은 또한 물질계 땅, , 새들, 바다의 아버지이시며 그분은 자신의 자녀를 통하여 그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이곳은 그분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생태론이라는 말은 그 어원이 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잊지 말라. 너무나 아름다움에도 우리들이 함부로 취급하고 있는 이 모든 피조물은 노예상태의 비천함에서 해방되어 의미 있는 공간으로써 이제와 영원히 그분의 자녀들과 하느님을 섬기려는 희망을 품고 있다(로마 8, 19-25).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보다 더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없을 거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우리의 아버지로, 모든 것과 개별적인 것의 아버지로서 하느님을 선포하는 것. 또한 모든 물질계의 아버지, 이 안에서 우리의 하늘나라가 자라고 드러난다.

 

 

결 론

우리 자신과 온 세계 공동체의 인간적, 영적, 사도적 성장을 위해서는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전망이 매일의 생활 안에서 더욱 성장해 가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아버지의 기쁜 소식을 사는 공동체는 생명과 에너지를 뿜어낼 것이고 결국 복음 사명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끝-

 

 

 

편집자 주 : 이 글은 progressio에 실린 Ochagavia 신부의 글을 옮긴 것이다. 4회의 내용 중 마지막으로, Ochagavia 신부가 여러해 동안 걸친 신학적, 사목적인 반성의 열매를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글들은 영성 - 사도적 그리고 이냐시안으로서의 -을 신선한 시각으로 드러내 주는데, 개인 기도와 공동체의 성찰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으로 이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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