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 소명과 사명(1) > 마중물

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나눔터
- > 나눔터 > 마중물
마중물
마중물

평신도 : 소명과 사명(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10-02 15:08 조회19회 댓글0건

본문

                    

                                        

평신도 : 소명과 사명

친밀함과 외적인 표현




평신도와 관련하여 우리는 소명사명을 거의 구별 없이 사용하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교회 안의그리고 세상 안의평신도에 관해 얘기합니다. , “교회와 세상 안에서의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친밀함과 외적인 표현이 연속적인 단계가 아니라 원형적인 단계 아니, ”나선형으로 올라가는구조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명과 사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두 축이며 뗄 수 없고, 상호 키워가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적 기도혹은 기도로 가득 찬 사도직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또는 예수님에 의해 파견된혹은 영성이나 윤리 혹은 부르심과 응답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평신도가 되는 것은 받은 은총의 삶과 상응하는 일관된 삶의 양식을 계발하는 문제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성경 구절은 많습니다. 요한복음 151-17절에는 포도나무와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요한 동사는 맺다(열매를)”남아있다혹은 이 단어들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 단어들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가지는 덩굴에 붙어 있을 때에만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없으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고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 안에 머무르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열매를 맺어라... 열매는 남는다. (16)

 

분명 기도와 사도직 사이에, 머물러 있는 것과 열매를 맺는 것 사이에, 부르심과 응답 사이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긴장은 건설적인 긴장이며 때로 이 둘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미성숙함이나 역사적인 오류 때문입니다. 예전에 이렇게 얘기되었고, 때로 지금도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 세상과 떨어져 - 기도의 삶(관상적인)을 선택하거나 세상 속에서의 삶(사도직, 활동적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기도에서 흘러나온 것이며 기도가 사명에 역동성을 주었고, 예수를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세상이 느낌과 움직임을 만들어내었고 예수님은 기도 안에서 아버지께로 마음을 모아가셨습니다.

 

강생에서부터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까지 예수님의 감추어진 사생활을 살펴보면, 큰 감동을 주는 수많은 은총이 있습니다. 분열된 세상을 보시는 성삼위의 마음 깊이 건든 것이 있었기에 성삼위는 영원한 일치를 스스로 깨시고 성자를 떼어 보내셨습니다. 2위이신 예수님의 사명은 바로 세상을 구속하는 것이었고, 스스로 작고 보잘것없어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위험을 감수하셨고, 위협을 받으셨으며 어려운 시험을 겪으셨습니다. 헤로데의 사악한 계획과, 이집트의 망명 생활, 진정으로 친밀한 나자렛에서의 가정생활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들 동안 예수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감춰진 사생활을 관상하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해 성장하시고,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가시고, 강생을 통해 스스로 깨뜨린 삼위일체를 회복해가셨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편과 성경에 능통한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분명 마리아는 예수에게 천사의 무염시태 알림을 얘기하셨을 것이고, 동정으로 잉태하셨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목동들이 왔으며 현자들과 시메온의 이야기,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던 일 등등 모든 것을 쉬운 말로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나이에 맞게 어린 소년 안에서 지혜가 날로 조금씩 쌓여갔습니다.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들에서 예수님은 서서히 그 의미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중요한 순간이 예수가 12살이 되던 해 일어납니다. 예수는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양성을 받고자 하십니다. 예수는 아마도 부모님뿐만 아니라 현자들과도 오랫동안 대화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는 분명 많은 독서를 하셨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예수님과 관계를 하고, 예수님이 시편과 성경을 읽고, 유대인 마을의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에 혹은 다양한 순간에서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가 통찰이라고 말하는, 혹은 이냐시오 성인이 까르도네 강가에서 보았던 현시를 겪었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이심,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하느님을 버리심, 인간이 되심, 모든 인류를 데리고 당신께로 돌아가기 위해 받은 하느님의 은총들... ,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은총, 자신의 사명을 의식할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성부 아버지와 친밀한 일치를 이루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어린 정신과 마음에 예수님은 발견한 많은 것들로 혼란스러우셨고, 점점 더 당신을 아버지께로 이끌어가시는 성령을 알아보시는 감각을 키워갔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청소년들은 영적인 감정들과 통찰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다르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진리를 흔드는 무언가가 있었고 예수는 이를 나중에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사명과 성부와의 근본적인 일치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인식이 점점 커나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 많습니다.

 

요한 657 나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

요한 627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요한 519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5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

요한 426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요한 436 씨뿌리는 이와 수확하는 이

요한 814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있어 은총 안에서 자라는 것은 성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 인류에게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 한 때 깨신 성삼위의 일치를 다시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계속- 

 

*이 글은 프로그레시오 부록 #59(2004년 12월)에 실린 글로, 당시 CLC 부의장인 Jose Reyes가 2004년 에콰도르 퀴토에서 열린 마지스 프로그램에서 한 연설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histian Life Community     -
희망학교 페이스북